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팅/기록

여행의 이유 - 김영하

hicetnunc_stella 2020. 10. 8. 14:57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 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한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나는 여행을 하고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중 아주 일부를 보게 되겠지. ‘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지 말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이 순간은 유일하며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아니 꽤 많이 편해졌다.